1차 assignment를 다 쓰고 학과 웹페이지에 올리는데 에러가 났다. 다시 올리고자 했지만 더 이상 attach가 안 된다는 메시지만 떴다. Egil과 조교 양쪽 모두에게 확인해달라고 메일을 보냈으나 역시나, 이미 그들은 연말 휴가의 장정에 올라 있는 듯 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학과 건물로 갔더니 옆 학과의 Ruth가 혼자서 열심히 사무실에 불을 켜고 일하는 게 보였다. 그녀 쪽에서는 초면임에도 deadline 안에 상황을 파악해야겠다는 절박함에 방문을 두들기고 내 소개를 하고, 확인을 요청했다. 다행히 assignment는 무사히 잘 붙어 있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그녀가 "그래서, 학과는 만족스러워?"라고 묻는다. 순간 깜짝 놀랐다. 그녀가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줄 몰랐다. 사실 그녀는 내 운명을 결정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처음에 나는 그녀의 학과에 원서를 냈고, 그녀는 지금의 학과로 내 원서를 forwarding 시켜 주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Egil에게서 e-mail offer가 날라왔다. 빠른 프로세스도 그렇거니와, 보통 엉뚱한 곳을 노크하고 있다 싶은 원서는 바로 drop을 시켜버릴 텐데, 일부러 원서를 전달해준 그녀의 친절이 고마웠다. 그렇게 런던행을 고집했던 나의 마음은 신속하게 워릭으로 전향할 수 있었다. 1백명이 훨씬 넘는 입시 지원서를 보았을 터이건만, 그녀는 그 때 원서에 적힌 내 family name과 그에 딸린 CV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쪽 문을 두드린 건 단순한 실수는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뭔가 지금 향유하고 있는 field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이 지대했다. 일부는 싫증을 느껴서였고, 일부는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 그 견고함에 화가 났으며, 일부는 그런 견고함에 내가 본의 아니게 기여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나머지 일부는 심지어 그들로부터 박수와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더 이상 배울 게 없을 거라는 근거 없는 도도함이 약간의 향신료처럼 가미되어 있었다. 그러나 첫 학기를 마친 지금, 나를 본래의 세계로 되돌려 준 Ruth에게 지대한 감사를 하고 있다. 그 10주 동안 나는 내가 몸담고 있던 세계에 막연하게 느꼈던 거부감을 체계적으로 분석할 줄 알게 되었고, 그 원인이 보다 뿌리 깊은 근원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으며, 싫증을 내기에는 아직은 내가 해보지 못한 새로운 일들이 너무 많다는 걸 실감했다. 본의 아니게 서쪽을 향하고 있던 나의 시선은 이 곳에서의 깨달음으로 다시 동쪽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 시선은 다음 학기, 올리버의 가르침으로 더욱 날카롭게 다듬어질 것이다.
진심으로, 나는 Ruth에게 인사했다. "만족하고 있어, 그때는 정말 고마웠어, Ruth." Ruth는 "그럴 줄 알았어"라며 "언제든 우리 과 과목 듣고 싶음 알려줘, 청강시켜 줄게"라며 크리스마스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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