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때는 50년만의 폭설과 추위에 바들바들 떨며 살았건만 올해는 30년만의 고온기후로 포근한 겨울을 나고 있다. 사실 과정 시작하면서부터 날씨에 그렇게 불평하며 살았던 적이 없는 것 같다. 날씨만큼이나 모든 일들이 담담하고 평안하게 지나간 한 해였다. 드라마틱한 충격은 없더라도 중간중간 소소한 기쁨이 훨씬 많았고, 가장 짜증나고 화났던 적을 꼽으래야 연초 엄마랑 나흘 연짱 냉전상태에 들어갔던 것말고는 없던 것 같다(그것도 나만 나흘이었고, 이틀 뒤 엄마는 이미 유머 모드로 돌아서서 내 삐친 행동을 모두 개그로 만들어 버리셨다 -_-).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겪은 모든 감정과 사건들이 내 머리속에서는 그렇게 희석되는 것 같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과거에 그리 연연하지 않고 미련을 남기지 않는 나의 기억체계는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렇다고 돌아보기 싫은 과거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모든 일들과 사건들은 생생하게 떠오르지만 즐겁거나, 역겹거나, 견디기 힘들었던 감정의 흔적들은 놀라우리만치 퇴색되어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내게는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없다. 지금 이 자리까지 오기 위해 거쳐온 그 많은 경로 중 도로 돌아가고 싶은 길은 산티아고 뿐이다. 그러나 그 산티아고조차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안다. 똑같은 장소에 똑같은 계절에 돌아가더라도 그곳은 이미 다른 장소가 되어버려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없다면 나는 현재에 만족하고 있는 것일까. 어제 내내 생각해봤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태어나서 감정과 이성의 균형이 가장 평온하고 안정되어 있는 걸 느끼지만, 지금 이 자리 또한 그저 거쳐가는 길임을 너무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다. 다만 길을 제대로 걷고 싶을 뿐이다. 지금 이 현재가 미래의 어느 순간을 만들 또 하나의 과거가 될 것임을 알고 있기에, 그냥 허트루 지나가고 싶지 않을 뿐이다. 어쩌면 한없이 불안하고 둥둥 떠다니기만 하는 나란 존재는 그렇게 변하고, 거쳐가는 흐름 그 자체를 진짜 나라고 느끼는 지도 모르겠다.
그 모든 불안정과 부유가 오직 내게만 한정되어 있다는 건 내가 가진 또 하나의 행운이다. 아무런 근거 없이 늘 내게 관대하고 이해해주고 바라봐주는 소중한 나의 가족과 친구들은 방랑하는 내게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다. 그 고향이 내년에는 덜 속상하고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최근 덧글